첼랴빈스크 핵 참사와 환경 위기 극복을 위한 역사적 교훈

이미지
옛 소련의 우랄산맥 남부 첼랴빈스크 지역에는 핵무기를 제조할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재처리시설이 있다. 이곳에서는 1957년 가을 재처리과정에서 생성된 고준위 액체 폐기물을 저장하고 있던 용기가 폭발하여 대규모 방사능 오염이 발생했다. 1,000~2,000km²의 지역이 방사능으로 심하게 오염되었고,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다.  마을이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했기 때문에 32개의 마을이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곳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금지구역이 되었고, 주위 환경에서 격리하기 위해 그곳으로 흘러들어 가는 강들의 경로도 댐이나 운하를 통해 변경되었다. 이 사고는 1976년에 망명한 소련 과학자 메드베데프에 의해 서방의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정확한 원인과 피해는 옛 소련 당국의 보도 통제로 인해 사고 후 30년이 지났을 때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 옛 소련 당국에서는 체르노빌 사고 후 3년이 지난 1989년 8월에 처음으로 이 사고의 전모를 공개했는데, 이에 의하면 사고는 80톤의 액체 방사성 폐기물이 들어 있던 용기가 폭발하여 터지면서 발생했다고 한다. 사고 후 1만여 명의 주민 모두에게 소개령이 내려졌지만, 사고가 나자 즉시 살던 곳을 떠난 사람의 수는 600명이었고 나머지는 수개월이나 수년 후에 떠났다고 한다.  사고 후 시간이 상당히 흐른 후에 지역을 떠난 사람들은 심각한 방사능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그 후 후유증에 크게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기술자들이 입은 피해도 공개되지 않았는데, 이들도 심각한 방사능 노출로 치유가 어려운 장애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현대의 극단적인 환경문제에 직면해서 우리가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환경위기로 인한 파탄은 인간이 자연자원이 무한정 존재한다는 믿음 위에서 자연자원을 무분별하게 낭비하여 발생했다. 또한 이러한 무분별한 파괴는 결국 대규모 파...

산업혁명이 초래한 전 지구적 환경 위기의 특성

이미지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없이 인류가 근대화·산업화로만 치달리는 과정에서 빚어낸 산업사회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연과 인간의 고립적 분리가 가져온 문명적 위기상황인 것이다. 인간만을 생각한 개인주의적 물질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연을 언제라도 마음대로 퍼내어 써도 된다는 생각, 즉 자연을 인간에게 필요한 자원의 창고로만 여겨온 인간 중심의 그릇된 생각이 초래한 문명적 위기라는 의미이다.  결국 산업화는 이루어졌지만 인간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의 터전인 자연생태계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파괴되고 만 것이다. 지금은 자연생태계가 우리에게 심각한 역작용을 주게 되었다. 생태계 파괴에 따른 자연재해는 물론이고, 천연자원도 이미 고갈되거나 오염되어 가고 있다. 19세기 초까지의 환경문제는 거의 대부분 숲의 파괴와 경작지 확대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때까지의 환경문제는 전 지구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적인 것이었고, 되돌리기 어려운 비가역적인 것이 아니라 금방 복구될 수 있는 것이었다. 중세에 유럽 전체가 한 세기 이상 극심한 혼란과 침체를 겪기도 했지만, 현재의 전 지구적인 환경위기와 비교할 때 지역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지구의 어느 한 부분에서 숲이 대대적으로 파괴되고 있을 때에 아프리카나 남미, 동남아시아 그리고 시베리아에는 여전히 울창한 숲이 건재했고, 로마의 납이 유럽대륙 끝까지 날아갔다 해도 그것이 아시아나 아메리카 대륙까지 날아가지는 않았으며, 또한 16세기에 런던의 스모그 때문에 런던 시민 전체가 고통을 받았다고 해도 영국의 농촌지역까지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던 것이다. 환경문제가 전 지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유럽의 산업혁명이 전 세계로 퍼짐에 따라 산업화가 전 지구적인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유럽문명은 그때까지의 에너지와 자원의 순환구조를 따르던 생활방식을 벗어나 자연 속의 자원과 에너지를 대량으로 사용함으로써 순환구조를 파괴했고, 이는 되돌리...

이스터섬 문명 붕괴와 중국 황사의 역사적 기원

이미지
숲의 파괴로 인한 파탄의 더욱 극적인 사례는 유럽보다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문명 전체가 사라져 버린 이스터섬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터섬은 나무가 거의 없고 사람들도 얼마 살지 않지만 바닷가에 서 있는 거석상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커다란 거석상을 누가 어떻게 세웠는지 불가사의로 생각했다.  이스터섬의 꽃가루 화석을 분석한 결과 몇 가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는 이스터섬 사람들의 멸망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실과 연관이 깊다는 것이다. 이스터섬은 원래 나무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섬에 500년경에 폴리네시아인이 이주하여 숲을 개척하고 농업을 짓기 시작하면서 섬은 서서히 변해 갔다.  주민들은 바나나, 고구마, 사탕수수 등을 심었고 땅이 매우 비옥했기 때문에 많은 수확을 얻었다. 인구는 점차 불어났고, 불어난 인구에게 식량이라는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해 더 넓은 숲이 개척되었다. 인구는 더욱더 불어나서 1100년경에는 만여 명에 달했고, 이스터섬은 최고의 번영기를 맞았다.  이 번영기는 수백 년간 지속되다가 1680년쯤에 갑자기 인구가 급격하게 감소하면서 문명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 이유는 중세 유럽과 마찬가지로 1400년경에는 숲이 거의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무가 없어진 뒤에도 약탈농업은 한동안 지속되었지만, 지력이 고갈된 땅에서는 제대로 된 수확을 기대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점차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되었고, 부족들은 마지막으로 남은 숲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웠으며, 결국 그로 인해 최후의 숲마저 파괴되고 말았다. 결국 사람들은 영양실조와 전염병과 그리고 나무라는 에너지를 차지하기 위한 부족 간의 싸움에 의해서 급작스럽게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스터 문명도 사라지고 말았다. 숲의 파괴는 유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중국에서는 유럽보다 훨씬 이른 시기부터 석탄이 연료로 활용되었다.750년경부터 1100년경 사이에 북부중국에서는 화석연료가 전례 없던 규모로 사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인...

중세유럽의 숲 파괴로 인한 생태파탄

이미지
유럽에서 진행되었던 숲의 파괴는 로마의 몰락으로 강력한 통치권력이 사라지고 제국이 여러 작은 힘으로 분할되면서 일단 중단되었다. 물론 로마와 그리스의 숲은 복구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까지 파괴되었고 그 상태가 지속되었지만, 북유럽지역은 로마의 몰락으로 원시림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 상태는 중세의 유럽이 남부의 아랍침입자들을 격퇴하고 경제적·학문적으로 크게 번영하기 시작했던 12세기부터 달라진다. 12세기 유럽에서 진행된 숲의 파괴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농지개척에 의해서 일어났다. 인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기에 유럽의 인구는 2배 또는 3배로 늘어났다고 한다. 역사가들은 인구증가의 원인을 당시에 도입된 바퀴 달린 쟁기라는 새로운 농업기술의 도입에서 찾지만, 이 기술이 오랜 기간에 걸쳐서 확산되었고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그 이전에 이미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에 정확한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새로운 농업기술은 생산력을 증가시켰고, 이로써 인구증가를 200년간 지속시킬 수 있었다.  이를 위해 계속해서 숲이 농지로 개척되었는데, 이 땅은 상당히 비옥했다. 그 결과 많은 지역에서 곡물생산이 크게 늘어났고 잉여량도 많아졌다. 그러자 인구가 더욱 늘어났고, 수천 개의 새로운 마을이 생겼으며, 이와 더불어 더욱 넓은 숲이 파괴되었다. 1050년경의 유럽은 숲의 바다에 사람들의 주거지가 섬처럼 박혀 있는 형상이었다.  당시에 숲은 인간에게 적대적인 것, 요괴·유령·악마가 사는 곳, 사람이 살기에는 맞지 않는 곳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 세기 반이 지난 1300년경에는 도처에 마을이 생겨났고, 숲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형상이 되었다.  1050년경에 진보적인 토지소유자들은 농부들에게 숲과 습지를 개척할 것을 권장했다. 그러나 1300년경에는 오히려 농부들이 유럽의 남은 숲을 더 이상 파괴하지 않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게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13세기와 14세기 ...

고대 로마의 환경문제

이미지
로마는 그리스보다 도시화가 더욱 대규모로 진행되었으며, 전쟁 무기와 선박 제조 또한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 파괴 역시 그리스에 비해 훨씬 심각했다. 이미 도시국가이던 로마가 조금씩 팽창하던 시기에 평지의 숲은 농지 확장을 위해 상당 부분이 사라진 상태였다. 따라서 산지의 숲에서 벌목한 나무가 운송되어 왔는데, 나무가 사라진 산지는 농지를 더욱 확장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동안 평지의 농장들이 지속적인 토양침식으로 점차 지력을 잃어갔기 때문에 농장주들에게 언덕이 농지로 제공된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또한 도시국가 때부터 끊임없이 전쟁을 치렀던 로마의 전쟁무기 제조를 위해서는 광산에서 구리와 철이 채굴되고 야금이 이루어져야 했는데, 나무는 이 두 가지 작업에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나무는 갱도의 갱목으로뿐만 아니라 야금하는 데 필요한 연료목재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도 함대건조를 위해서 숲이 대규모로 파괴되었다. 로마가 해상강국이 된 시기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진행되던 기원전 3세기 중엽이었다.  해상전쟁을 위해 로마는 대규모 함대를 유지해야 했는데, 당시의 전쟁 중에 백척 이상의 함선이 60일 만에 건조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도 로마는 수년간 수백 척을 더 건조했으며, 이 막강한 해군력으로 카르타고에 승리를 거두었다. 함대건조를 위한 목재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숲에서 조달되었고, 이 지역의 나무가 점점 사라져 가자 이탈리아 밖의 다른 정복된 지역에서 나무가 수입되었다.  그 후 로마의 함대는 로마 지배하에 놓여 있던 나무가 풍부한 지역 어디에서나 건조되었다. 로마에서 전쟁무기와 함대건조 이외에 숲의 파괴를 크게 촉진했던 것은 로마시민이 최소한의 쾌적한 도시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목욕탕이었다.  기원후 4세기, 로마에는 11개의 호화로운 대형 목욕탕과 856개의 소규모 목욕탕이 있었으며, 이들에 필요한 장작과 목탄은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숲을 여지...

고대 그리스 함대 건조가 남긴 지중해 숲 파괴의 역사

이미지
숲의 파괴는 이미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커다란 문제로 대두되었다. 인간이 거주하기 이전 지중해 지역의 대부분은 숲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이 숲은 에너지 확보, 약탈농업, 그리고 각종 기구, 특히 선박 건조에 의해서 크게 파괴되었다.  플라톤은 「크리티아스」에서 아테네 주변이 비옥하고 부드러운 흙이 사라지고 골격만이 남아 있는 말라 비틀어진 육체의 뼈와 같다는 은유로 숲의 파괴에 대해서 탄식했다. 그는 그 이전에는 산이 나무로 가득 차 있었지만 농지가 확장되면서 파괴되고, 기후변화로 갑자기 많은 비가 내리자 토양이 침식된 현상에 대해서 기술했던 것이다.  플라톤은 「크리티아스」에서 당시의 파괴상황에 대해 비유적으로 언급했지만 실제로 그리스의 섬들과 반도지역에서 숲의 파괴는 상당한 수준이었다. 현재 그리스는 나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들로 덮여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 때의 숲 이용으로 인한 것만은 아니지만 그때 이미 상당 부분 사라진 숲이 19세기 그리스가 오토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인구증가와 농지의 확장으로 더 철저하게 파괴된 결과이다.  그리스 문명이 쇠퇴한 후 그리스의 숲은 다시 넓어져 오토만 제국 지배하에서는 그리스 땅의 40% 정도가 되었으나, 그리스가 독립한 후에는 14%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고대 그리스의 숲을 파괴하는 데는 농업뿐만 아니라 대규모 함선의 건조도 크게 기여했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테네의 목재 수요 규모는 그 이전에 비해 크게 증가했는데, 그 이유는 지속된 인구증가와 건축규모의 확대에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목재 수요가 그렇게 크게 증가한 이유는 주로 해군함대의 건조에 있었다. 당시에 아테네는 지중해의 해군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는데, 이는 대규모 함대에 힘입은 것이었고 함대건조를 위해서는 많은 양의 목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무로 된 군함은 수명이 그다지 길지 않았기 때문에 배들은 지속적으로 새로 건조되어야 했다.  아테네의 숲이 이런 대규모 함대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

관개농업으로 인한 토양의 척박화

이미지
현재 전 세계 농업지의 1/6이 관개농업 방식으로 재배되고 있고, 전 세계 식량의 약 1/3이 이러한 재배지에서 생산되고 있다. 관개에 의한 작물 수확량은 빗물에 의한 수확량보다 2~3배 정도 더 많지만 관개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대부분의 관개수에는 토양이나 암석에 함유되어 있던 염분이 용해되어 있다. 그런데 이 물이 농지로 공급되면 수분은 작물에 흡수되거나 증발하지만 염화나트륨과 같은 염분은 지속적으로 토양에 잔류한다. 염류화(salinization)라고 하는 이러한 염분의 집적은 작물생장을 저해하고 수확량을 감소시키며 결국에는 토양을 척박하게 만든다.  때때로 비가 올 경우에는 비에 의해 염분이 씻겨 나가기 때문에 염분 농도가 심각할 정도로 높아지지 않지만, 건조한 기후에서 농업을 전적으로 관개에만 의존할 경우에는 염분의 집적이 급속히 일어나 짧은 시간 안에 농지가 황무지로 변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관개농업이 문명을 붕괴시킨 사례는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문명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지역은 건조기후로 강우량이 매우 적지만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활용해서 대규모 관개농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관개농업을 통한 염분 집적이 이루어진 결과 그 지역의 거대한 농지는 점차 수확이 줄어들어 식량부족현상이 발생했고, 결국은 문명의 붕괴가 초래되었다.  고고학적 조사 자료에 의하면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한 지역이 상당한 기간동안 번성했다가 쇠퇴한 후 다른 지역이 번성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는 관개농업으로 농지에 염분이 집적되어 더 이상 농업을 지을 수 없게 되자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땅이 염분 집적으로 인해 농업을 짓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식량부족 등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위기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문명이 붕괴되는 결과가 왔던 것이다. 관개농업으로 인한 토양의 황폐화는 지역적으로는 현재도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런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20세기의 ...